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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의 역사인물을 찾아서> 단파라디오 사건의 주역 성기석

기사승인 15-07-3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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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시는 개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흥도시이긴 하지만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역사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고,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곳의 뿌리를 통해 지역에 대한 애정을 쌓아가는 일입니다.

지금은 광명하면 아파트촌을 연상시키지만 곳곳에 수많은 자연마을이 있고, 수많은 집성촌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 동네에 특정 성씨가 왜 많이 살고 있고, 그들이 언제부터 광명에서 살게 됐는지, 그리고 그들이 광명에 어떤 영향을 미쳐 왔는지 광명매일신문은 매주 한차례식 연재를 할 예정입니다.

▷ 1945년 8월 16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된 독립투사들. 주황색 원 안에 있는 인물이 성기석이다.

가학동 장터말 버스 정류장에서 안서초등학교로 50m 정도 도로를 따라 걸어가면 왼편으로 공적비, 묘비, 망주석 등이 보인다. 창녕성씨의 묘역이며, 일제시대 단파라디오 사건의 주역 성기석의 묘가 있는 곳이다.

성기석은 일제 말기 독립운동 소식을 목숨을 걸고 전파했던 단파라디오 사건의 주역 중의 한사람이다.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실린 해방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중 전면에 있는 사람이 성기석이다.

성기석은 1920년 1월 파주에서 태어나 3.1 만세운동에 가담한 모친의 영향으로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성기석은 1938년 경성전기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방송국에 입사한다.  성기석은 1942년 단파라디오 3대를 만들어 중국의 중경방송과 미국의 소리를 청취하게 된다. 당시 중경방송에서는 김구와 김규식의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간간히 전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소리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을 전하고 있었다.

성기석은 3대 중 1대는 본인이 소유하고, 2대는 주변인물에게 전하여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과 미국의 승전, 즉 일본이 패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결국 성기석은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반장인 사이가 시치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함께 형무소에서 수감됐다.  이 사건으로 200여명이 구속되고, 5명이 고문을 견디다 못해 숨을 거두었다.

결국 일본은 패망하고 성기석은 형기를 6일 앞둔 8월 16일 감격의 해방소식을 듣고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석방된다.

이후 성기석은 이리방송국 방송과장, 연희 송신소장, 수원송신소장, 남양송신소장 등 KBS 방송기술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1975년에 정년 퇴임했다.

성기석은 1990년 사망한 후 독립을 위한 공로을 인정 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성기석 공적비, 비가 온 뒤라 잡풀이 무성하다.

성기석 묘 앞에는 1990년 6월에 후배 방송인들이 세운 “애국지사 성기석 선생 공적비”가 놓여 있다.  공적비에는 “기리고 또 기려 삼가 여기 새긴다.  가슴조린 단파방송 독립햇불 당기다. 뒤늦게 님이 베푸신 건국훈장 애족장 빛나고 또 빛나 여기 안식하다”라고 적혀 있다.

▷ 성기석의 묘, 상석의 글로 보아 성기석의 부인 전주 이씨와의 합장묘인 것을 알 수 있다.

성기석 묘에는 망주석 및 상석 외에 별다른 석물은 없다. 왼쪽으로는 조부인 성낙유의 묘가 있다. 묘비에는 “불공 십여년에 불신이 도와 나라 잃어 헤매는 사람들에게 쌀과 옷을 주고, 영농은 번성하고 일손은 달렸다“라는 요지의 글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부(富)를 이룬 사람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오른 쪽에는 4대 조부인 성종영의 묘가 묘비, 망주석과 함께 있으며 돈녕부도정의 벼슬을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성기석의 본관은 창녕이다. 성기석은 파주에서 나고 서울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창녕성씨의 종중묘가 있는 광명 가학동에 묘를 썼다. 광명시 공석골에는  창녕성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고, 종중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성기석의 묘는 공석골이 아닌 장터말에 위치해 있다.

▷ 장터말 버스 정류장에서 안서초등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보이는 공적비와 창녕성씨 묘역

광명매일신문

<저작권자 광명매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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